국민의힘 대변인 공식 논평 및 보도자료입니다.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5월 17일 자신이 1980년대 감방 생활을 했던 광주교도소 터를 찾아 5월 민주 영령들의 넋을 기렸습니다.
김 후보는 1980년대 엄혹한 권위주의 시절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을 주도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안양교도소에서 목포교도소로, 다시 광주교도소로 전전하면서 포승줄에 묶인 채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면서 2년 5개월 동안 영어(囹圄)의 몸이 됐습니다.
김 후보가 1987년 구속돼 있던 광주교도소 감방은 1982년 50일 동안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다가 숨진 전남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고(故) 박관현 열사가 투옥돼 있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교도관은 민주화 투사인 김문수를 독방에 집어넣으면서 “박관현이 죽어 나간 데니까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해!”라고 했다고 김 후보는 아픈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감방 벽엔 박관현 열사가 적어 놓은 ‘민주’라는 글씨가 흐릿하게 파여 있었습니다.
김 후보는 광주교도소만 생각하면 시도 때도 없이 포승에 묶여 있고 수시로 고문을 당해 너무 많이 아픈 기억이 남아 있다며 한동안 말문을 잇지 못한 채 눈물을 삼켰습니다.
김 후보는 어제 “5월 정신은 누구를 미워하거나 공격하는 수단이 아니라 많은 희생 위에 대한민국이 서 있다”며 “인간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피 흘리고 고통받는 많은 희생 위에서 꽃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5월의 아픔을 딛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만발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광주교도소에서 걸핏하면 징벌방에 보내졌던 김 후보는 수시로 포승에 묶인 채 고문을 당한 기억에 광주만 찾으면 가슴이 아프다고 합니다.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에 대한 갈망이 누구보다도 큰 5월 민주화 운동의 아픔이 김 후보 가슴 깊이 패여 있습니다.
민주투사 김문수는 감옥에 누워 있으면 구더기가 몸에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광주와 목포교도소 원예반에서 국화꽃을 키우며 인간의 존엄성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독재와 고문의 서슬 퍼런 권위주의 시대에서도 그는 한 송이 국화꽃을 키우며 오로지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망했습니다. 그런 아픈 기억 때문에 김 후보는 요즘도 국화만 보면 말문을 잃은 채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합니다.
김 후보는 매년 5월 광주를 찾으면 당시엔 얼굴도 몰랐지만 감방 선배였던 박관현 열사 묘소를 꼭 찾아 참배합니다. 박 열사의 누님은 김 후보를 만나면 동생이 생각나 아무 말 없이 계속 우신다고 합니다. 김 후보 모습에서 동생의 모습이 교차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제 박 열사 묘소를 참배하던 김 후보를 향해 ‘독재 세력 물러나라’며 고함을 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김 후보는 “5월 정신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5월 정신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개탄했습니다.
김 후보의 감방 동기로 어제 함께 광주교도소 터를 찾은 1980년대 노동운동 투사 송종환 씨는 “망월동 박관현 열사 앞에서 김 후보의 눈물을 보고 슬픔을 참을 수 없었다”며 “입법부를 다수결로 독재하고 사법부도 독재하고 행정부마저 이재명이 가져가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 김문수는 최저임금은커녕 근로기준법도 보호받지 못하는 열악한 공장 노동자를 위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직장에서 해고되고, 경찰에 쫓겨 도망치고, 심지어 삼청교육대 교육 대상으로 올라 몸을 피해야 했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 3권 독재를 노리는 이재명 후보는 김 후보가 안양과 목포, 광주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를 때 무얼 하고 있었나요?
오로지 자신의 입신 영달만을 위해 도서관에 처박혀 사법고시 공부를 한 사람과 너무 대조되는 삶을 살아온 김 후보에 대해 송종환 투사는 거듭 외칩니다.
“입법 독재자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면 이제 진짜 계엄을 해도 절대 해제할 수 없습니다. 민주운동 감방동지 우리 김문수 후보를 꼭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십시오.
국민 여러분,
5월 영령이 숨 쉬는 오늘 5월 정신의 진정한 계승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2025. 5. 18.
국민의힘 중앙선대위 대변인 최 영 해